[책] 법정스릴러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와 법정소설번역의 문제에 대한 잡설
(2009년에 적어둔 글이 블로그가 없어서져서 다시 전재하는 내용입니다)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 (The Lincoln Lawyer) : 마이클 코넬리
법정스릴러물의 재미를 번역이 반감시키다..
마이클 코넬리의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를 읽었다.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작가지만, 알고보니 신문기자 출신 작가로, ‘해리 보쉬 시리즈’라는 LA경찰을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물을 14편이나 내는 등 널리 알려진 인기작가란다.
검색해보니 해리보쉬 시리즈의 첫 작품인 ‘Black Ice’가 1996년에 시공사에서 번역출간된 적이 있지만, 그리 크게 국내에 알려진 것 같지는 않고, 결국 작가로서는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한 외전 격인 이 책이 번역되면서 나름 인기를 끌고, 그 여세를 몰아 다른 몇 편의 작품이 번역출간된 모양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가 모습이 내가 유학시절 마지막 해 세들어 살던 집 주인 하고 굉장히 닮았다. 임대보증금을 떼먹었던 악덕 건물주였던 나쁜*)
여하튼, LA에서 활동하는 형사사건전문 변호사(defense attorney)인 마이클 할러가 주인공인 이 책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는 한마디로 정말 뛰어난 법정스릴러물이다. 극적 재미로 본다면 존 그리샴의 어떤 책보다도 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개와 반전, 그리고 배경설정이 독자를 즐겁게 한다.
우선, 주인공 자체가 그야말로 ‘돈에 환장한’ 속물근성의 변호사로 묘사된다. ‘정의’ ‘진실’ ‘인권’ 뭐 이런 것 들은 다 웃기는 이야기이고,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쓰레기들이라고 하더라도 돈만 가져다 줄 수 있다면 OK인 그런 형사법 변호사의 현실적인 이해에 철저한 인물이다. 형사법 이론으로 중무장하고, 검사가 제시하는 증거를 교묘하게 탈색해서 의뢰인을 법의 마수에서 빼내어 오면 그뿐일 뿐, 실제로 의뢰인이 무죄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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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업한 지 15년, 이제는 단순한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법이란, 사람과 생명과 돈을 닥치는 대로 삼켜버리는 거대한 괴물이다. 나는 괴물을 다루고 질병을 고쳐주는 전문가이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내는 것뿐이다. 지키고 품어야 할 법 따위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진실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곳엔 오직 타협과 개량과 조작만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나도 무죄냐 유죄냐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유죄 아닌 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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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였던 아버지의 말처럼 ‘가장 무서운 의뢰인은 무고한 의뢰인 (There is no client as scary as an innocent man.')이라는 신조를 달고 산다. 진짜 결백한 의뢰인에게는 단 한가지 해답밖에는 줄 수 없기 때문이다. 타협이나 양보가 아니라 반드시 무죄판결을 얻어내야하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변호인으로 평생 양심의 가책을 안고 살아야한다는 이유인데, 수많은 의뢰인들을 만나서 사건을 해결해주었지만, 드디어 마이클 할러에게 진짜 ’결백해 보이는‘ 의뢰인이 나타난다.
루이스 룰레, LA의 고급 부동산 중개인인 그가 밤에 술집에서 픽업한 여자 집에 갔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자는 흉기로 상처를 입고, 그는 경찰에 상해 및 강간 미수 혐의로 체포되었다. 루이스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고, 결백하다고 주장하는데, 변호사 비용을 많이 줄 수 있는 대박 고객인 그가 할러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할러는 생전 처음 진짜 무고한 의뢰인을 만난 것 같아 긴장하는데, 사건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충격적인 실체가 드러나고, 몇 년전 자신이 맡았던 지저스 메멘데즈라는 다른 의뢰인의 사건과 엮여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할러는 지금까지 자신이 변호했던 나쁘기는 하지만, 그리 사회에 큰 해악이 되지는 않는 범죄자들과는 다른 새로운 진짜 악마(pure evil)과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름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줄거리이다. (더 자세한 설명은 스포일러가 될 것이므로 생략)
형사사건 전문변호사의 추악하리만큼 현실적인 묘사와 두명의 전처(한명은 심지어 LA 검사라는 설정), 마약중독자, 거리의 갱, 인터넷 사기꾼 등의 훌륭한 고객들, 변호사와 범죄자의 구분이 애매모호한 모습들을 잘 풀어가는 것을 읽다보면 마이클 코넬리가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인지를 실감하게 되고, 다른 작품도 자연스레 찾아보고 싶어진다.
자 이제 칭찬은 이쯤 하고, 어쩔수 없이 번역이야기를 해야겠다.
국내 번역소설의 질에 대하여는 웬만하면 대충 넘어가고 싶지만, 법 관련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번역 때문에 이 훌륭한 법정스릴러의 참맛이 10%는 퇴색된 것 같아 몇 가지만 짚어보자.
이 책을 번역하신 번역자분은 원래 스릴러 호러 장르의 전문번역가로 유명하신 분이다. 하지만, 전문 법률용어가 난무하는 이 책을 번역하기엔 많이 힘겨웠던 것 같다. 역자후기에도 그런 고민을 토로하고 있다. 번역이 완성된 상태에서 다시 새로 번역하는 등 고생은 하신 것 같지만, 이쪽 세계를 좀 들여다 본 본인의 시각으로는 많이 아쉽다.
결국 도대체 이런 번역은 원문이 뭘까 하는 생각에 The Lincoln Lawyer의 페이퍼백 책을 사게 되고야 말았다.
우선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라고 할수 있는 “There is no client as scary as an innocent man.”만 해도 그렇다. 이를 ‘순진한 사람만큼 무서운 의뢰인은 없다’고 옮겼는데, ‘innocent'가 ’순진한‘일까 ’무고한‘ 또는 ’결백한‘일까?
형사절차의 ABC라고도 할수 있는 ‘피고인’과 ‘피고’의 구분 역시 -우리나라의 수많은 번역자들의 공통적인 관례에 따라 - 구분 못하고 쓰고 있다. 시종일관 형사사건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defendant' 는 그냥 ‘피고(被告)’이다. (가끔 ‘피고인(被告人)’ 이라고 옳게 표기한 곳도 발견되기는 한다)
30페이지에 가면 “피고에게는 담당 검찰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변호사와 검찰의 이해가 충돌한다면 물러나야 하는 것은 검찰쪽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세상에 어느 법치국가의 형사절차에서 피고인이 담당 검사를 선택하는 제도를 택하고 있는가? 원문은 the defendant has the right to his choice of counsel. 이다. ‘counsel'은 검사라는 뜻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변호인 (국가를 대리하면 검사, 상대방을 대리하면 변호사)이라는 의미이므로, ’피고인은 변호인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인데, 완전히 반대로 해석한 경우이다.
전문적인 형사절차용어에 대하여 친절한 주석을 달아준 것은 의미가 있지만, 첫 장면에 증장하는 보증인(bondsman) 페르난도 발렌수엘라가 ‘보석보증인’으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정도는 이야기 해줬어야 할 것 같고, 미국 법제도에서는 Van Nuys Superior Court (121쪽)이 “반 누이스 대법원”이 아닌 그냥 1심 법원이라는 것은 전후 맥락만 봐도 알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다. (미국 법원제도에서의 1심법원 이름은 천차만별인데, 심지어 뉴욕주에서는 1심법원이 ‘Supreme Court’이다 - 많은 기자들이 뉴욕주 대법원으로 오역하는 ‘관행’이 있다)
하지만, 가끔 거의 새로 번역하다시피 했다는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부분도 종종 발견되는데, 간단한 불법점유(61쪽, possession case)를 ‘불법 마약, 무기 등의 소지 사건’으로 번역하지 못한 것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곳곳에서 jury를 ‘판사’로 번역하는가 하면,
“trial lawyer는 옷도 잘 입어서는 안 된다는 통설”(55쪽)에서 trial lawyer를 ‘평범한 변호사’로 옮긴 것은 그 의도를 잘 간파하기 힘들다.
또한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쿠바'에 갔다는 식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캘리포니아 변협이 나를 쿠바로 유배시켜 버렸다. 변호사의 부적절한 행위에 대한 징계인 셈이다. 쿠바. 나는 90일동안 업무정지처분을 받았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중형이었다"(467쪽) 그런데, 문맥을 살펴보면 CUBA는 지리적인 섬나라 쿠바가 아니고, suspended for Conduct UnBecoming an Attorney 를 축약한 것임을 알수 있다. 상식적으로도 징계를 하면서 '휴가'를 보내는 것도 말이 안되고, 무엇보다 미국인은 쿠바로 일반 여행을 갈수 없다는 점도 생각했어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지적하려면 많은 다른 사례가 있으나, 별 의미가 없을 듯하여 이쯤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법정묘사와 전문용어가 난무하는 이 책과 같은 경우에는 좀 편집과정에서 세심한 교정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2009. 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