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맥아더 평전, 한 인물의 공과
<맥아더 Macarthur>
리처드 B 프랭크 저, 김홍래 역
2015. 플래닛 미디어
도서관에서 지나다가 발견한 맥아더 장군의 평전. 워낙 유명하지만..요즘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리암 니슨 선생이 맥아더 역으로 출연해서 다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1880년생으로 1차대전, 2차대전, 한국전쟁까지 21세기 전반부 대부분을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미 육군사관학교 수석졸업+연대장 생도 역임, 1차대전 중 준장진급(38세), 최연소 육사교장(39세), 육군참모총장(50세), 필리핀 육군원수, 태평양전쟁당시 서남태평양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종전이후 연합군 총사령관 등 최고의 경력을 이어갔다.
1951년 한국전쟁중 중국과의 전면전을 주장하다가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해임당하고 전역하였으니 장군만 33년을 지낸 대단한 위치에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미국에서의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토머스 블레이미 장군은 “맥아더에 대해 당신이 들은 최악의 말과 최고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데이빗 헬베스템의 역작인 'Coldest Winter' 에서도 맥아더 장군의 생애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맥아더를 폄하하는 목소리도 상당하다. 태평양전쟁 전문 역사가인 저자 리처드 프랭크는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맥아더의 공과 과를 균형잡힌 시각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워낙 오랜 기간 최고의 자리에 있었고, 또 역사적으로도 가장 격동적인 시기에 활동하였으니 그에 대한 평가가 갈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맥아더의 공이라고 평가되는 부분은 태평양전쟁에서의 이른바 개구리뛰기 전략으로 성공적인 전투를 이어갔고, 전후 일본의 복구와 안정에 노력한 점, 그리고 그의 경력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타오른 정점인 인천상륙작전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불리한 지형에 상륙작전을 수행해 불리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킨다는 도박(?)이 맞아 떨어졌고, 이후 김일성의 북한군은 사실상 전쟁끝까지 주도적인 전투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저기 많이 나오는 표현이 “5000:1의 성공확률을 극복하고 작전에 성공했다”는 말이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포스터에도 같은 표현이 나온다. 맥아더가 직접한 말이라는 문헌도 있고, 리지웨이가 말했다고 서술된 책도 보았는데, 과연 이러한 확률계산의 근거는 무엇일까? 내 생각에는 아마도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싶다. 5000 to 1 gamble 이라는 표현도 있듯이 아주 확률이 희박한 그런 가능성을 이야기한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여하튼 인천이 상륙작전을 펼치기에는 공격자 입장에서 아주 불리한 지역은 맞지만, 1950년 9월 당시에 김일성 입장에서 인천을 제대로 방어할 만한 전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인천상륙작전은 크게 성공했지만 거꾸로 이러한 성공이 이후 한국전쟁에서의 맥아더의 경력에는 마이너스로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특히 10군단 병력을 다시 배에 태워 반대편 원산에 상륙시키려 했던 시도는 국군이 먼저 육로로 원산에 도달하면서 아주 웃기는 상황이 되어 벼렸고, 이후 북진하면서 좌우 군대를 나누어 중공군의 포위망으로 뛰어든 실책은 누가 뭐래도 총사령관인 맥아더의 책임이다.
이외에도 맥아더의 군 경력상 실책이라고 생각될만한 장면도 상당하다. 우선 참모총장재직당시의 보너스군대 진압사건,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어이없이 일본의 기습에 필리핀에서 보유하고 있던 상당한 항공전력을 한방에 상실하고 필리핀 방어에 실패한 장면도 그렇다. 하지만 당시 진주만 방면의 사령관들이 강등되거나 불명예전역한 반면 맥아더는 계속 살아남았다.
미국 육군사관학교에는 맥아더의 동상이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지휘관으로서 활동하면서 선견지명을 보이고 리더쉽을 발휘하여 2차대전 이후의 아시아 지역의 판도를 결정하는데 크게 기여한 맥아더 장군. 그에 대한 엇갈린 평가는 현재진행형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맥아더의 공과 양쪽을 다 알려주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에서는 훌륭하지만 두 개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까지의 다양한 장면을 380쪽 남짓한 분량으로 담당하기에는 다소 부족했다고 느껴지는 점이 흠이다. 일종의 간추린.. 맥아더 평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사족>
맥아더의 해임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군가를 인용한 그의 사임연설로도 유명하지만, 맥아더의 해임사실은 1951년 4월 12일 정오에 마침 동경에 머무르고 있던 육군장관 프랭크 페이스가 직접 맥아더에게 전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카고 트리뷴 신문이 이를 기사화할 것을 안 백악관에서는 새벽 1시에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맥아더의 해임을 발표했다. 결국 맥아더는 자신의 해임소식을 라디오 뉴스로 들었다. 그의 회고록은 "어떤 사환도, 어떤 파출부도 어떤 하인도 이렇게 무례한 방식으로 해고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기록했다.
<== 2014년 6월 당시 유모 문화체육부장관은 러시아출장도중 모스크바공항에서 주러시아 한국대사관을 통해 해임소식을 전달받고, 후임자인 정성근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자진사퇴하자 후임자 없이 바로 면직처리한 사건이 있었지요. 이정도는 양호한 것일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