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사형제도와 행형에 관한 진지한 질문: 다카노 가즈아키의‘13계단’

더사문난적 2009. 11. 5. 00:58


가까이는 강호순 사건에서부터 유영철, 정남규 등 흉악한 연쇄살인자들의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면서 사실상 방치되었던 사형제(또는 사형집행)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은 아직도 실제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는데, 일본의 사례에 비추어 우리가 배워야 할 일은 없을까? 하는 시각에서 보면 좋은 추리소설이 바로 ‘13계단’이다.


상해치사로 사람을 죽인 전과자인 주인공 준이치는 교도관인 난고의 도움으로 가석방되지만 생활이 막막하다. 이때 이름을 밝히기를 거부한 독지가가 거액의 보수를 걸고 어느 사형수의 무죄를 증명해 줄 사람을 구한다. 교도관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난고는 준이치를 설득하여 10년 전에 벌어진 살인 사건을 새롭게 조사하기 시작한다. 희생자는 가석방자를 보호 관찰하던 보호사 노부부였다. 당시 살인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사형이 확정된 료는 사건 현장 근처에서 붙잡혔으며, 당시 교통사고를 당해 당일의 기억을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던 것은 ‘죽음의 공포에 떨며 오르던 계단’ 뿐. 이제 앞으로 사형 집행일까지는 불과 3개월이 남았다. 기억 속의 ‘계단’을 찾아 나선 준이치와 난고, 그러나 계단의 흔적은 사건 현장 그 어디에도 없었고, 난고와 준이치는 난관에 봉착한다. 과연 료는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잔인하게 노인 부부를 살해한 진범인가?


소설은 거액의 보수를 약속받고 사형수의 무죄를 밝혀내는 두 사람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추리기법으로 따라가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사형제도 및 현대 국가의 범죄 관리 시스템에 의문을 계속 던진다. 일본에서 형사사건이 처리되는 기본적인 내용에서부터 법무부 장관이 최종적으로 사형집행 결정을 내리기까지의 절차와 사형이 진행되는 과정을 묘사하며 사형 제도를 간접적으로, 그러나 생생하게 체험시켜 준다. 또한, 주인공 중 한명인 교도관 난고의 눈을 빌려 두 차례의 사형집행 과정을 자세히 묘사한다. 집행 당일 사형수를 ‘마중’ 나가는 교도관의 발자국 소리에 발작을 일으키는 사형수나, 사형수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일으킨 사건들, 죽음 앞에 나타나는 각양각색의 사형수 모습, 처형을 집행할 때 교도관들이 갖는 살인에 대한 공포, 죄를 부정하는 사형수 앞에서 사형수에게 올가미를 씌워야 하는 교도관의 복잡한 심정 등이 상세히 묘사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과연 사형집행제도가 존재하여야 하는가 하는 의문에 답하게 한다.


더구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들을 직접 다뤄야 하는 교도관의 시각과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전과자의 시각에서 일본의 교정행정제도가 실제로 범죄인을 교화하고 재사회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고, 출소한 사람이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가슴에 와닿게 묘사하고 있다. 사실 일본의 현실이나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것이 실제상황인 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실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고쳐야 할 것이 없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인 다카노 가즈아키는 원래 TV드라마작가와 영화각본가로도 활약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여러 번의 반전을 배치하면서도 전혀 어색하거나 의외스럽지 않은 전개를 보여줘 극적인 재미도 뛰어나다. 이 소설도 2002년에 일본에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사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일본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못했으나, 이 책을 보고 일본추리소설의 높은 수준을 절감할 수 있었다. 구성보다는 작품전반을 관통하는 사회의식에 더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저자의 ‘13계단’에 만족했던 독자들이라면 후속작인 ‘유령인명구조대’ ‘그레이브디거’ ‘6시간후 너는 죽는다’ 등의 작품도 한번 살펴볼 것을 권한다.


다만 좀 아쉬웠던 것은 번역인데, 번역자는 서두에서 ‘일본식 표기를 한국에 맞게 표기하였으나, 상황에 따라 일본식 표기를 보존하였다’고 하고 있으나, 마땅한 한국어 표현이 있음에도 일본식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많이 거슬린다.

예컨대, 우리나라 법제도에 ‘사면’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에도 일본의 용어인 ‘은사(恩赦)’를 사용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소설에서 주요한 코드인 ‘원죄(寃罪)’라는 말도 굳이 이렇게 어려운 한자를 계속 써야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 사건은 원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 이런 식으로 쓰고 있음) 왜냐하면,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은 ‘원죄’라고 하면 ‘原罪’를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쉽게 ‘누명’을 쓴 사건이라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사형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소설은 꽤 많이 나와 있다. 1995년작으로 팀 로빈스가 감독한 데드맨워킹(Dead Man Walking)이라는 영화도 있고, 스티븐 킹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그린 마일(The Green Mile, 영화화는 1999년)에서도 1930년대 미국의 교도소에서의 사형수 감방의 이야기를 자세히 다룬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지영이 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5)이라는 소설이 이나영과 강동원 주연으로 이듬해 영화화되어 나름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또한 2001년에 이미연과 박신양이 주연했던 영화 ‘인디언 썸머’도 살인범과 사형제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2009.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