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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백선엽 자서전 군과 나

더사문난적 2010. 5. 7. 15:46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 2009년 시대정신 432쪽

1989년 경향신문에 연재되었던 내용을 단행본으로 묶었다가 1999년에 이어 다시 2009년에 재출간된 백선엽의 자서전(회고록?)을 읽었다.

한국전쟁에 대하여 누구나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상식과 달리, 한국전쟁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어찌 보면 전쟁사에 대하여 관심 있는 사람도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쿠르스크 전차전, 미드웨이 전투에 대하여는 알면서도 이 땅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에 대하여는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그런데, 또 한발 떨어져 생각해보면 한국전쟁의 실상에 대하여 잘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6·25를 제대로 다룬 전쟁사 책이 없는 것도 그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하튼 오랜 기간 묵혀뒀던 이 책을 찾아 읽게되었다.

백선엽 장군하면 한국전 전기간 중 한국군인으로서는 가장 눈에 띄는 전공을 세우고 승승장구하여 승진을 거듭, 참모총장, 한국군 최초의 4성장군으로도 진급한 경력을 자랑하며, 미군으로부터도 좋은 평가를 받는 장군(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상 군대로서의 기초가 거의 없었던 1950년 전쟁발발 당시의 군대를 이끌고 치른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이후 평양 수복전에 이르기까지의 활약,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과 이후 2군단 창설  등등의 업적은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 입수할 수 있는 자료가 한정된 현실에서 보더라도, 대체로 위의 평가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초기 모든 물적, 인적자원이 열악한 상황에서 이러한 활약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보면 운도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대표적인 게 1950년 10월 백선엽 장군이 1사단장을 마치고 2군단장으로 전보되었던 것인데, 발령을 받은 후 며칠 만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임자인 유재흥 소장이 다시 2군단장으로, 백선엽은 도로 1사단장으로 복귀하게 된다. 유재흥이 지휘하던 2군단은 중공군의 대공세에 11월 덕천전투에서 미군 2사단과 함께 사실상 궤멸되었는데, 백선엽장군이 2군단을 계속 지휘하고 있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유재흥 소장은 1950년 11월 2군단을 말아먹은데 이어, 1951년 5월 강원 현리지역 전투에서 3군단을 또다시 말아먹은 한국전쟁을 통털어 가장 큰 패전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국방부장관도 지냈다)

당시 군인들, 정일권 참모총장이나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였겠으나, 30살에 사단장(준장), 31살에 소장, 32살에 중장, 33살에 한국최초의 육군 대장 (1년에 별 하나씩 추가!),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39살에 전역하고 대만, 프랑스, 캐나다 대사에 교통부장관까지.. 신생국가 초기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누릴 수 있는 지위와 영광은 다 경험해 본 성공한 인생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의 시스템이 얼마나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는지 6·25발발 당시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은 3개월 전부터 시흥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훈련’을 받고 있던 중이라 서울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1953년 5월에는 휴전이 성립하기도 전에 참모총장의 신분으로 미국 군사시설 견학 및 군단급 지휘코스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엉성했던 시절에 한발 앞선 사람이라면 발전한 다른나라에서 보다 엄청난 자기발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자서전’ 격인 ‘회고록’을 읽다보면 현명한 독자라면 책에 쓰여 있지 않는 부분도 생각하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는 이야기를 쓰면서 불리한 부분을 과감히 묘사하는 것은 웬만큼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의 만주군 시절에 대한 묘사(131면 이하)는 대충 넘어가고 있고, 3군단이 와해된 현리전투에 대한 평가(222면) 역시 그리 객관적이지 않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묘사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국민방위군 사건과 서민호 의원사건(299면)에 대한 것도 그냥 신문기사를 옮겨다 놓은 듯 하다. 재미있는 것은 책 앞부분의 약력에 군생활과 관련된 사항만 있다는 것. 본문에서도 전역 이후의 자리에 대하여는 주요국가의 공관장을 역임하고 건설부 장관으로 취임했다는 말만 있을 뿐, 이후의 기록에 대하여는 기록이 아예 없다. 물론 6·25전사에 대한 회고록인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동생인 백인엽과 함께 ‘선인학원’을 만들어 이후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에 대하여는 자신 스스로 냉정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특히 1920년 생으로  정정하신 필자의 최근의 행보에 대하여는 자세한 설명을 략하는게 좋겠다 (20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