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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증거없는 재판, 알렉산더 스티븐스 - 모든 증인은 거짓말을 한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더사문난적 2021. 2. 13. 21:16

<증거없는 재판> Aussage gegen Aussage. Urteile ohne Beweise

알렉산더 스티븐스 지음, 서유리 옮김 2021. 바다출판사

129일에 출간된 최신간. 250쪽 남짓한 슬림한 분량이기도 하고 워낙 내용이 재미있어서 집어들자 마자 금방 읽게 되었다. CSI 같은 범죄수사물을 보면 최신 수사기법을 이용해 사건의 전모를 완벽히 찾아낼 수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책에 따르면 독일에서) 모든 사건의 70% 정도가 결국 증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판결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영국태생으로 독일에서 형사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 알렉산더 필립스는 물리적인 증거가 없고 당사자의 진술이나 증언만이 있는 경우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저자는 실제 사건 7가지를 분석하고 사람의 진술, 증언이 얼마나 신뢰를 부여하기 힘든 것인지를 살펴본다.

 


소개된 사건들이 모두 흥미진진하다. 영화 프라이멀 피어유주얼 서스펙트같은 충격적 반전을 담은 사례도 많다. 아마도 이 중 일부는 독일 사회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사건일 것 같다.


1) 잘생긴 외모로 큰 인기를 끌던 정치계 스타가 선거뒤풀이 파티에서 인턴을 성폭행을 하였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

2) 공격적인 변론태도로 욕을 먹던 K변호사가 마약상을 변론하면서 허위의 양형협상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사건에서 K변호사의 주장과 판사와 검사의 (일치된) 진술과 충돌한 사건,

3)
갑자기 사라진 농부를 살해한 것으로 기소된 농부의 가족 4명이 아무런 물적 증거가 없음에도 자세한 범죄행위를 자백한 사건


4)
온라인 범죄에서 하나의 IP를 공유한 2명의 용의자가 있고, 이들의 주장이 상반되는 사건,

5)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 성폭행 피해를 당했다며 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고 일관되게 진술한 피해자와 이와 정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남성의 사건,


6)
이혼소송 중인 남편이 자신과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성폭행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의 사건 등등 호기심을 유발하는 내용이 많다.


특히 마지막 사례는 피해자인 증인의 직업이 매일 형사사건을 맡아 재판을 하는 형사법원 판사인 사건인데
, 아무리 훈련된 형사재판 판사라고 하더라도 기억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가를 언급하고 있다.

 

저자는 사회학자들이 독일은 무고범죄의 비율이 3%밖에 안될 정도로 낮은 나라라는 분석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분석이 타당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잘 짜여진 거짓말은 알아챌 수 없으며, 성공한 무고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말했다는 “100퍼센트의 알콜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100퍼센트의 진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의 기억은 매우 부정확하며, 특히 사람의 심리라는 채널을 통과해서 나오는 진술의 내용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증언의 진실여부를 가리기 위해 진술분석 심리학이라는 도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분석도구의 도움도 명확한 한계가 있고, 진실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판사 역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저자는 판사들이 진술분석 심리학에 대하여 아는 것은 교황이 결혼에 대하여 아는 지식만큼일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라고 지적하며, 인간의 능력으로 증언의 신빙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이러한 최종 판단의 영역에서는 판사들이 자유심증주의라는 명목 아래 평균 이상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부당한 확신을 부여한 것이 아닌지 우려한다.


심리학을 건강한 상식의 학문이라고 하듯이 증인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이미 건강한 상식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신중한 출발선에서 판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범죄의 성립을 입증하는 증거가 단 한 명뿐인 증인의 진술일 때 특히 그 증인이 범죄의 피해자인 경우, 그 진술의 동기를 파악해보고 이를 중립적으로 판단하는 준비가 필요하다고 한다.

 

저자가 소개한 7가지 사건은 일반적인 경우가 아닌 극단치에 해당하는 한정된 사례일지 모른다. 또한 저자의 저술방향에 맞게 적절히 선택된 정보만이 주어진 것일 수 있어 독자의 판단 역시 제한적일 것이다. 하지만 사건들의 전개는 일반적인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실제 사건 당사자의 입장이라면 어떤 판단을 했을지 생각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


사회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일의 사례를 다룬 책이지만
, 우리나라에서도 상반된 주장을 다루는 사람들이 좀 더 신중하고, 한번 더 의심해보고 건전한 상식을 기반으로 판단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를 기대해 본다. 저자의 말처럼 서로 맞서는 두 개의 진술 중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시니컬한 평가를 하는 것은 너무 절망스럽지 않은가. (2021. 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