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영화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산책" - 발칙한 번역제목 붙이기에 대한 단상

더사문난적 2021. 1. 23. 18:28

<Made in America : An Informal History of the English Language in the United States> 
 발칙한 영어 산책 -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 , 빌 브라이슨 지음 정영옥 옮김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유명한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 산책'을 찾아보았다. 

일단 책을 받아보면 두가지 측면에서 놀라게된다. 
먼저 엄청난 두께. 무려 678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이 일단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그 다음으로는 내용이다. 마치 무슨 영어 교재같은 (번역서) 제목과 표지의 저자 그림에서 연상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 펼쳐진다.

(미국식) 영어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메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도착한 이민자들 뿐 아니라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대륙의 개척사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구석구석 돌아보는 '미국문화사 개론'이라고 분류해야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디언'으로 잘못 이름이 붙여진 북미대륙의 원주민들이 있던 공간을 밀고 들어온 이민자들의 구성, 독립전쟁과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형성과정, 여러 나라에서 넘어온 '미국인'의 정체성 찾기, 미국의 경제발전과 이에 도움을 준 다양한 발명의 성패, 광대한 활동공간을 서쪽으로 확장하면서 붙여지게된 수많은 지명들의 유래 등등에 더하여 미국의 여행, 음식, 쇼핑문화, 예절, 광고, 영화, 스포츠, 항공, 우주 산업에 이르기 까지 상세하고도 재미있는 설명이 이어진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부담스러운 분량이라는 점을 쉽게 잊게 만드는 저자 특유의 글솜씨에 유인되면서 현대 미국식 영어의 발전과정과 함께 미국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미국과 관련한 공부나 업무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교양서로 충분하다.


재미있는 부분은 맨 뒤에 붙어 있는 역자후기.  첫 문장이 "아 괴로운지고!" 이다.

"여기서 번역가의 비애를 논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송구하지만, 이 책은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은 괴로움을 느끼게 한 책이었다.....(후략)"

토착 원주민 인디언 부족이 썼다는 말에 더하여 미국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그 과정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던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국의 고어 같은 언어의 연원을 찾아가면서 사회 문화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많은 등장 인물과 함께 두툼한 분량 내내 설명하는 내용이다보니 (이디시어나 중국어 일본어 체코어 심지어 코리아게이트도 나옴) 번역자 입장에서는 엄청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10000% 공감이 간다. 이 책을 처음부터 영어 원서로 볼 생각은 엄두도 안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 군데 구석구석 궁금한 포인트가 있긴 한데 이건 향후 원서를 한권 페이퍼백으로 사서 찾아볼 생각이다) 아마 움베르토 에코를 번역하는 이윤기 선생의 고민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역자께서는 부디 많은 번역료를 받았거나 인세계약을 잘 하셨기를 기원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국내 번역출판사에서 제목을 '발칙한 영어산책'으로 정한 것은 그야말로 misleading 하는 제목달기가 아닌가 싶다.

작가가 나름 인기를 끌다보니 빌 브라이슨의 작품을 "...의 발칙한 **"이라고 연관되는 시리즈인 것처럼 일관된 제목을 붙여 출간하는 모양인데, 처음 '발칙한'이라고 나온 책이 "발칙한 유럽산책"(2008)인데 원제목은 'Neither Here nor There"

 

저자의 다른 책들,

발칙한 영국산책 (Notes from a Small Island),

발칙한 미국 횡단기 (The Lost Continent),

발칙한 미국학 (Notes from a Big Country) 등의 영어제목을 봐도 '발칙한'은 출판사가 임의로 붙인 표현이다.

애초 발칙하다라는 말이 "하는 짓이나 말이 매우 버릇없고 막되어 괘씸하다"라는 뜻임을 생각해본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라는 생각이다. (2021. 1. 23.)

영어판 표지가 훨씬 책의 내용을 잘 설명해주는 디자인이다 

 


사족>

'발칙함'에 끌린 나머지 제목에 '발칙'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연원을 추적해보았다.

아마 1998년에 나온 연극대본 "발칙한 녀석들" (1천만원 현상공모 창작마을 희곡문학상 당선작)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발칙한 밀크" (2000), "그대 또...속았다 : 20가지 사랑 이야기로 만든 발칙한 시"(2001)에 이어 스콧 버거슨이 쓴 "발칙한 한국학"(2002), "세상을 뒤집는 발칙한 상상"(2003) 등등 많은 책들이 나온다.

이후 '발칙한'은 영문법, 지리이야기, 경제학, 세계사, 상상영단어, 고고학, 군사학, 건축학, 특목고(?), 요리사, 배낭여행, 중국어, 학원경영 등등 장르를 넘나들면서 아무런 한계라도 없는 듯이 마구 조합되기 시작한다. 2000년대 초반을 계기로 좋은 뉘앙스를 가진 것처럼 변이되기라도 한 것처럼..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 역시 또 하나의 Made in Korea 인가..

#발칙한제목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