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증인>
마이클 코넬리의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4편 "다섯번째 증인"이 번역되어 나왔다.
미국에서는 2011년에 "the Fifth Witness"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기자출신 작가인 마이클 코넬리는 상당한 다작으로 유명한데, 주인공이 형사인 '해리 보슈' 시리즈가 본류격으로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 외에 해리보슈의 배다른 형제인 변호사 미키 할러가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일종의 스핀오프 시리즈도 계속 내놓고 있다. 가끔은 형사물인 해리보슈 작품에서도 법적 이슈에 대한 묘사를 제대로 하고 있어서 마음에 든다. (특히 '콘크리트 블론드' 라는 작품 추천)
아마도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체득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취재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슈가 나올때 마다 열심히 공부하고 나름대로 연구를 해가며 이를 소설에 담아내려는 노력을 하는 기본자세를 꾸준히 견지하는 것이 다작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평균이상의 작품을 써내는 비결이 아닌가 싶다. 이번 작품에서도 2011년 당시의 시점에서는 최신 매체였을 '페이스북'이 하나의 소재로 나온다. 1956년생인 작가의 꾸준한 노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미키 할러 변호사가 처음 등장한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진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the Lincoln Lawyer)"이고 이후 'Brass Verdict"(탄환의 심판), "the Reversal"(파기환송)으로 이어진다.
마이클 코넬리는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형사법 이론으로 무장하고 사법제도의 틈새를 찾아 의뢰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여기에서 돈만 벌면 된다는 캐릭터를 창조했다. "의뢰인(피고인)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는 매우 현실적인 변호사 주인공. 전형적인 정의감 넘치는 주인공 변호사를 기대했다가는 다소 당황할 수 있다.
여하튼 이번 작품 '다섯번째 증인'은 형사법 전문인 미키 할러 변호사가 미국 서브프라임 사태의 여파로 경기가 침체되고, 사건 수임이 저조해지자 결국 "민사"사건 분야에도 등떠밀려 뛰어든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LA지역에서 금융기관으로부터 보증을 받아 주택을 구입한 사람들이 상환위기에 처하자 자연스럽게 주택압류, 경매 등등 일거리가 생기고, 주로 은행이나 채권추심위탁을 받은 전문기업들을 상대로 집을 잃을 위기에 처한 건물소유주들을 대리하는 일을 맡는다. 비록 보수는 건당 2,500불 정도의 푼돈이지만 부지런히 광고도 내고 활동하여 많은 사건들을 처리하게 된다.
미키 할러가 따분한 주택관련 소송대리를 하다니! 좀 실망할 법 하지만 대표적인 악성고객(?)중 한 명인 리사 트레멀 부인이 자신이 돈을 빌렸던 은행의 대출담당 부사장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면서 이제 전문분야인 형사사건으로 무대가 바뀐다.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생략할 수 밖에 없어 아쉽지만, 피고인에게 매우 불리한 여러 정황증거와 목격자, 혈흔, DNA 등을 극복하면서 의뢰인이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악전고투하는 변호사의 활약이 재미있게 그려진다. 미국 형사소송의 현실적인 이슈를 실감나게 다루면서 벌어지는 검사와 변호사간의 두뇌싸움도 흥미진진하다.
아마도 코넬리 작품을 몇권 봤던 사람이라면 기대할법한 막판의 반전도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솔직히 전작인 Reversal 에 살짝 실망했던터라 크게 이번 작품에 대한 기대가 없었던 것이 사실인데 이정도 작품이라면 영화화도 기대가 된다. (심지어 코넬리 선생은 이번 소설 본문에서 영화화를 제안하는 제작자가 주인공으로 '매튜 매커니히'가 어때? 라며 눙치는 장면도 집어넣어뒀다)
자 뭐 작품 칭찬은 이 정도로 하고, 어쩔수 없이 언급하고 넘어가야 하는 법정소설 번역 이야기.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열악한 번역현실을 충분히 알고, 업계의 사정도 나름 이해하는 편이다. 하지만 법률이슈를 다루는 법정소설이라면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본적인 연구 역시 필요하다. 동시통역사들이 그날 그날 다루게 될 통역대상의 발언 주제에 대하여 사전에 깊이 공부하는 것처럼, 전문분야에 대한 공부나 아니면 전문가의 조언이라도 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은 번역을 기다리다가 지쳐 2015년에 페이퍼백 영어본을 구해서 읽었던 적이 있기에 읽어내려가다가 번역본에서 덜컥 하고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부분 두 가지만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갑자기 (유리해 보이던) 검사가 피고인측에 플리바게닝을 하자고 하면서 제안하는 장면(180쪽)
검사 : "살인에 중간수준 징역형 어때요?"
미키 : "고의적인 살인으로 가자는 거죠?"
검사 : "변호사님도 과실치사를 주장하기는 힘들거에요"
이렇게 번역한 것만 읽어본다면 무슨말인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냥 살인죄 하나인 우리 형법 체계와 달리 영미법에서는 살인을 'murder 모살(사전에 기획한 살인)'과 'manslaughter 고살(사전 계획이 없는 살인)'을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을 설명 해주지 않으면 한국 독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더 복잡한 문제는 manslaughter는 또 'voluntary manslaughter'와 'involuntary manslaughter'로 나누고 있어서 위 번역문과 같이 'involuntary manslaughter'를 그냥 '과실치사'로 옮기는데서 발생한다.
'involuntary manslaughter'는 우리 형법에서 이야기하는 과실치사의 범위보다 넓은 개념이고, 한국독자들은 일반적으로 '과실치사'라고 하면 운전 중 부주의로 사망사고를 일으킨 것과 같이 "고의가 없이 사망의 결과를 발생시킨 경우"를 상상하기 때문에 적절한 번역이 아니다. 차라리 이 맥락에서는 폭행치사가 더 적합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2. 검사측 증거를 인정하는 장면 (429쪽)
"재판시간을 절약하고 배심원단이 DNA 분석에 대한 길고 지루한 설명에 시달리지 않도록 변호인측은 명기(明記-분명히 밝히어 적음, 옮긴이) 하겠습니다."
명기에 해당하는 영어 원문은 stipulation이다. 물론 사전적 첫 뜻은 '규정하다' '적시하다'이지만, 법률용어로는 `voluntary agreement between opposing parties concerning some relevant point'라는 의미도 있다.
번역자는 친절하게 주석을 달아 부연설명을 하고 있지만, 엉뚱한 부분을 설명하고 있다. 검사가 제시한 증거를 피고인 변호사가 '분명히 밝혀 적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검사가 제시한 증거내용을 잘 받아적었다는 뜻도 아닐터이고.. 하지만 두번째 의미로 보면 이해가 간다. 즉 검사측이 DNA관련 자료를 제출했는데 이를 "증거로 인정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동의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 형사소송법에 있는 제도인 '증거동의'를 가져와서 "변호인 측은 해당 DNA분석에 대한 (증거)동의를 하겠습니다"라고 옮기는 것이 훨씬 이해가 쉬웠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이것은 용어문제는 아닌데, 번역자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의아한 부분이다.
"셰에라자드 알아요? 클래식 음악인데, 라벨이 작곡한 거죠." (377쪽)
원문은 라벨의 '볼레로'이다. 모리스 라벨이 셰헤라자데를 작곡한 것도 사실이지만, 라벨의 Boléro 가 훨씬 더 유명하고 그 멜로디를 아는 독자들도 훨씬 많은데 이걸 바꾼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사실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도 '볼레로'는 들어봤고 워낙 그 멜로디가 유명해서 뭔지 떠올리고 흥얼거릴줄 안다. 하지만, 세혜라자데는 라벨의 작품인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조용하게 시작하다가 가속도가 붙고 고조되는 것과 같이 형사재판절차도 진행된다는 예를 설명하면서 비유로 든 음악인데, 이걸 왜 일부러 잘 모르는 '셰헤라자데'로 바꿨는지 물어보고 싶어졌다. (2017.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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